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디 아민 (문단 편집) === 몰락 === 아민의 학정이 끝을 보이지 않자 우간다 국민들은 좌절하여 '아민은 불멸의 존재이고, 살아 생전에 다른 지도자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며 모든 희망의 끈을 놓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정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우간다 내부에서도 존경 받던 자나니 루움(Janani Luwum, 1922?~1977) 대주교를 죽인 아민 정권에 대한 분노와 불만이 고조된다. 참고로 자나니 루움은 영국 [[성공회]] 대주교로서 당시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 [[콩고]]를 관할한 인물로,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인 중 한 명이었고 이디 아민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루움은 1977년 2월 16일에 총살된 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사인이 조작되었으며, 아민이 직접 총을 쏴 죽였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루움 주교의 암살 7개월 후인 1977년 9월 20일에 우간다에서는 당시까지 허용되던 32개의 [[기독교]] 종파 중 무려 27개가 금지되고 단 5개만이 종교 활동을 허락받게 되었다. 1978년 군 내부의 반역 음모를 무마할 겸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이디 아민은 [[탄자니아]] [[우간다-탄자니아 전쟁|침공]]을 개시한다. 참고로 탄자니아에 대한 첫 공격을 직접적으로 명령한 사람은 바로 주마 부타비카였다. 이디 아민은 우간다군이 탄자니아군을 이길 수 있다는 오판을 하였고, 당시 탄자니아에 망명 중인 우간다 전 대통령을 잡으면 국내의 분노를 외부로 돌리고 정적도 없애는 일석이조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긴다면'''. 그러나 탄자니아군은 우간다군보다 체계적인 지휘 계통에다가 훈련도가 높았다. 또 우간다의 주력이던,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쓰고 나서 전 세계에 뿌린 낡아빠진 [[셔먼 전차]]보다 우수한 [[중국]]제 [[59식 전차]]와 [[62식 전차]]가 있었으며, 공군의 숙련도 역시 훨씬 높아 우간다의 중요 시설들을 정확히 타격하는 바람에 이디 아민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갈 지경이었다.[* [[리비아]] 공군의 [[Tu-22 블라인더]] 폭격기가 우간다군을 지원하기 위해 탄자니아를 폭격했지만 중요 시설 파괴에는 실패할 정도로 명중률이 뒤떨어졌으며, '''심지어 인접국인 [[부룬디]]에 폭탄을 투하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애초 탄자니아의 국력이 우간다를 훨씬 상회했고 총 병력도 15만 명으로 2만에 불과한 우간다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즉 이디 아민은 자신의 독재 권력 유지 하나를 위해 맨땅에 해딩하는 무리수를 범한 것이었다. 그나마 이디 아민이 믿었던 뒷배인 [[무아마르 카다피]]의 [[리비아군]]이 우간다를 지원했지만 '''오히려 [[C-130]] 수송기와 다수의 전투기 및 병력들까지 손실하면서 역으로 탄자니아군에게 패퇴해버렸다.''' 또한 우간다 전 대통령이 지휘하는 해방전선군이 우간다군에 맞서 게릴라를 하였다. 결국 우간다군은 이들의 협공에 패퇴하기 시작했고, 이디 아민은 당황하여 국민들에게 탄자니아군에게 저항하라는 국민 메시지를 내놓았지만 국민들은 되려 이들을 환영하였다. 탄자니아군 병력들이 캄팔라에 접근하고 있을 때에도 SRB 분대는 대통령 집무실이 작성한 암살 목록을 가지고 북부 마을을 순찰하고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